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4세 (문단 편집) ===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의 알력 === 에드워드는 아버지 요크 공작 리처드와 어머니 세실리 네빌 양쪽으로부터 [[에드워드 3세]]의 피를 이어받았다. 아버지의 사망 전 그는 아버지의 작위 중 하나인 마치 백작으로 불렸다. 에드워드는 실질적 장남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아버지를 수행했으며, 1450년대 후반 요크 공작이 본격적으로 [[랭커스터 왕조]]에 반기를 든 후에는 외삼촌 솔즈베리 백작을 따라 칼레에서 런던으로 입성하였고, 노샘프턴 전투 승리에 일조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그는 웨일스에서 요크파 군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타고난 당당한 체구와 잘생긴 외모로부터 오는 카리스마로 혼란에 빠진 요크 지지파를 성공적으로 결집했다. 군사 지휘관으로서도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와 타우튼 전투에서 연승하는 등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사촌인[* 어머니 요크 공작부인 세실리 네빌의 친정조카이자 세실리의 오빠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아들.] '''[[킹메이커]](Kingmaker)'''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이었다. 리처드 네빌은 에드워드 4세의 집권 초기에 가장 큰 세력을 누린 인물이자 '''역사상 최초로 킹메이커(Kingmaker)로 불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인 리처드 네빌이 권세가 높아지자 그가 불편해졌고,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될 것 같아 그에게서 떨쳐 내려고 시도했으며 리처드 네빌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에드워드 4세는 1464년 5월에 젊은 미망인 [[엘리자베스 우드빌]][* 참고로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전 남편 존 그레이 경은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서 [[요크 가문]]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과 몰래 결혼하여 자신을 발루아 왕실의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키려던 리처드 네빌 및 다른 요크 가문 귀족들의 분노를 샀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 자퀘타는 룩셈부르크 방계 가문 출신으로 [[헨리 6세]]의 인척인데다 영향력도 꽤 컸지만,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은 귀족이 아닌 [[랭커스터의 존|베드퍼드 공작]]의 시종무관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딸 엘리자베스는 사실상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신분으로나 정치적으로 아무 이득 없는 결혼을 해버린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가 첫 남편에게서 낳은 두 아들 및 그녀의 다섯 남자 형제와 일곱 자매를 총애하여 네빌 일가에 맞설 만한 세력을 형성했다. 이로 인해 리처드 네빌은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1468년 여동생 마거릿이 [[부르고뉴국]]의 [[공작(작위)|공작]] 용담공 샤를과 결혼식을 올리자 에드워드 4세는 매제인 샤를과 함께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